도서리뷰

전문가의 독재: 천부인권은 모두가 보장받을 수 있는게 아니다.

PeanutDog 2024. 1. 2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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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추천받았는지는 잊었지만 서문부터 상당히 내용이 흥미로워 열심히 읽었습니다.

 

1부 서문

부유한 나라의 논쟁은 다루지 않겠다.

발전이 가난한 사람들의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논의하고자 한다.

 

2부 발전사상의 실제 역사

개발되지 않은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이 두사람의 견해로 갈라진다.

 

군나르 뮈르달:발전을 위해서는 큰정부, 독재를 옹호할수있음 

개인의 권리는 중요하지않다.

가난한 이들은 그들의 권리에 관심도 없고 권리가 있어도 스스로 일 추진할 능력이 별로 없다.

정부가 발전을 성취해야한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발전을 위해서라고 개인을 억압해서는 안된다. 

개인의 권리가 사회빈곤에서 벗어나 번영에 진입하는 수단이다.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비판

위와 같은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사회나 나라 같은 더 높은 존재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이에 개인의 행복과 삶이 무시되고 반대 의견 수용안하고 무자비하게 억압하는 일이 벌어진다. 

 

하이에크는 특히나 나치 정권을 몸소 경험했던 만큼 큰정부, 독재에 치를 떤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개인이 어떻게 집단에서 미쳐가는지를 아는 만큼 더 그럴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두가지 논점이 앞서 제시되었음에도 이러한 두가지 논점이 강대국들에 의해서 논의된적은 없었다. 

2부에서는 왜 이러한 논점이 논의되지 않고 그저 발전만을 도와주겠다는 강대국들의 협조가 결과적으로 각 나라 정권의 독재정권에게 이용당한 것인지를 다루고 있다.

결국은 힘과 돈의 논리인데 그 시기가 딱 한국이 일제강점기이다 보니 읽는 입장에서는 씁쓸하기 그지없다.

한국의 수많은 행동들이 그나마 한국을 도울 수 있었던 강대국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관심없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나름 주체적인 국가라는 말을 했던 서양 국가들이 어떻게 인종차별을 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들은 중국에서 치외법권의 권리를 누려놓고 되려 중국인의 치외법권이나 이민은 전부 불가능, 무시해왔었다. 

특히나 아프리카 원주민들에 대해서 무시하는 영국 이나 미국인의 발언들은 차별이 얼마나 일관된 모습을 보이는지를 알려준다.

"아프리카인의 정신 상태는 유럽인보다~동물에 훨씬 가깝다고 말한다">문장에 아시아인도 포함되어있긴 하지만 당시 연합국에 일본이 들어가있기에 넣어준것이지 아시아인에대한 인종차별이 없었던게 아니다. 서양인들은 아시아인과의 혼합을 매우 경계하였고 배척하였다. 

"이 인종 유형의 장단점은 매력적인 어린이와 같다."

"우리는 바로 세계의 어린이 인종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평균적인 흑인은 살아갈 만큼만 일하며 그 이상으로는 일하지 않는다. (..)그들은 재산이나 문화에 관심이 없다. 따라서 그들의 경제적 수준을 높이려면 그들의 자유를 제한해야한다."

 

->성차별에서도 남자들은 여자들이 절약할 줄 모르고 사치만 부리려고 하며 깊은 사유를 하지 못해 로맨스 소설이나 보며 시간을 낭비한다고 폄하한다. 이렇듯 차별의 그림자는 무서울정도로 일관되게 일치한다.

 

3부 빈서판에 쓸것인가 역사에서 배울것인가

 

책에서 말하는 빈서판이란 나라의 실정을 고려하지않고 발전에 대하여 전문가들의 계획을 주체로 진행하는 것이고,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실정을 고려하여 발전을 도모하는 방향인 것으로 이해했다. 

테크노크라트적 방식으로는 정치는 논외로 두고 발전만을 고려한다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거 같은데 사실 정치를 논외로 두고 발전을 꽤하는 거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본다. 

물론 지금까지의 역사를 봐도 전부 빈서판에서 진행되었고, IMF와 같은 기구들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새로운 식민지 사업을 진행한다는 비판을 받게되었다. 특히나 각종 국제기구들의 발전만을 고려한 조언들은 고통만을 가중하고 빚만 늘렸다고 나또한 생각한다. 

여기서 강대국들이 좋은 빈서판 예시라고 일을 추진했던 나라들은 제1차세계대전 후의 중국, 90년대이후의 에티오피아 등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계속 근현대에서 빈서판과 테크노크라트적 방식의 발전을 주장하는 강대국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중세>로마 통치 무력화 후 자유도시 등을 거쳐 개인의 존중이 발전에 중요함을 몸소 역사로 깨우쳤지만 이러한 경험들은 개발되기전 국가와 개발후 국가의 발전과정은 다르다는 논리로 뭉개져버렸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적 가치가 어떤 성질이며 왜 끈질기게 존속하는지 비교하는 예시는 매우 흥미롭다.

 

제노바와 마그레브 이 두 지역 사람들로 비교하는데

마그레브 사람들은 바그다드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10세기 튀니지로 이주한 유대인들로 아프리카 북서부에 속한 곳이었으며 파티마 왕국의 수도였다. 파티마 왕국이 969년 수도를 카이로로 옮기자 유대인들도 같이 이주했는데 이 카이로의 소수 민족들 가운데 유대인 이민자 집단을 말하는것이 마그레브였다. 

 

이들은 공식적인 계약도 맺지 않고 계약에 대한 처벌 수단도 없었지만 돈을 받고 도망가는 대리인도 없었다. 집단주의적 가치하에서 계약없이 소수의 집단으로서 마그레브인들은 사회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각자 사업 정보를 교환하며 공유했다. 이는 사기꾼에 대한 정보역시 포함되어서 이런 정보를 활용해 사기친 대리인은 절대 고용하지 않는 블랙리스트를 활용한 것이었다. 마그레브 상인들은 그들끼리만 결혼했고, 그들의 자손은 아버지의 사업과 부정행위자들의 블랙리스트를 대대로 물려받았다. 11세기 동안 수익성 높은 지중해 독점 무역이 마그레브인들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이런식의 사회적 규범에 개인은 따르도록 강제되었다.  또 이러한 분위기에서 외부인은 내부인과 동등하지 않았고 외부인에 대한 도둑질은 수용되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가치가 폭넓게 수용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된것이다. 

 

그러나 제노바사람들은 소수민족이나 가문같은 사회집단준거로 무역을 하지 않았으므로 계약 집행을 위한 법적 시스템과 상설 재판소를 개발했다. 이에 따른 비용이 들긴 했으나 무역이 아주 큰 규모로 늘어나더라도 거래를 처리할 수 있었다. 

제노바는 계약에 따라 모든 사람이 평등했기에 각 집단이 형성되어도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웠다. 

이러한 차이는 12세기말 마그레브인들의 지중해 무역 지배력 상실로 드러났다. 곧이어 그들은 유대인 집단속으로 들어가 사라졌으며 13세기 지중해는 제노바 사람들의 것이었다. 1314년에는 제노바 사람들의 거래액이 1160년에 비해 46배로 불어났다. 1200~1300년대 제노바의 인구는 세배이상 늘어나 유럽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독재자에게 마그레브 집단같은 사회가 선호되었고, 이러한 신뢰 부재와 타인에 대한 존중 부재는 위계적 사회의 대표 특징이다라고 이탈리아 경제학자이자 문화연구자인 기도 타벨리니Guido Tabellini가 말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주의는 믿을게 못되며 개인은 근시안적이고 해로운 방향의 행동을 하는 자로 인식된다. 때문에 좋은 행동은 오로지 강압의 결과로 간주된다. 따라서 국가의 역할은 시민이 잘행동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된다. 

 

이후 17~18세기 자유의 최전선이 북부 이탈리아에서 서유럽으로 옮겨갔는가 에 대해서는 대서양 무역이 핵심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더불어 대서양 무역이 제도적 변화로서 헌법에 의한 견제와 균형이 통치자를 제한한 점이 핵심 조건 중하나로 꼽힌다.

 

독재의 역사와 집단주의적 가치관을 가지는 지역을 더 민주적인 역사와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지역과 비교하면 오늘날에도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난하다. 더불어 사회가 저신뢰, 저존중적 특징을 지닌다. 바로 자신의 내부인외에 외부자를 배척하고 차별하는 사회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수결 투표가 중요한게 아니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피통치자들의 동의가 중요하다. 

둘쨰 독재를 겪은 후 출범한 민주주의에 너무 많은걸 기대해서는 안된다. 독재의 영향을 벗어나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위와같은 예시사례들을 들더라도 독재와 집단주의적 가치가 빈곤을 초래한다는것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이둘 사이의 관계는 상관관계이지 인과관계가 아니다. 

테크노크라트적 접근에서는 권리가 긍정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증거가 엄밀하지 않다는 이유로 권리에 대한 거론을 완전히 무시한다. 물론 발전에서 독재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독재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고 여긴것은 아니다. 그들은 독재자가 자유로운 개인들에 비해 발전을 더 많이 달성할 것이라는 실용적 주장을 펼친것이며, 개인적 자유또한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물질적 보상을 얻는 대가로 개인정 자율를 포기하자고 하는 주장이다. 

물론 테크노크라트적 독재적 발전관이나 개인주의적 발전관 중 어느쪽에서도 절대적 표준을 충족할 만큼 엄밀한 증거난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내용까지를 보았을때 역사적으로 발전의 성공은 자유와 개인주의적 가치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임을 보았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정부의 권한을 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독재자들을 정당화해주는 테크노크라트적 발전 논의에서 무시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리적 요인으로 발생한 억압 연구에 좋은 사례

-아자족: 1600~1700년대 신세계 지역들을 노예시장으로 만든 원흉은 인도원산지 작물인 사탕수수. 

유럽에서 설탕 수요가 늘면서 사탕수수 농장에 동원된 노예 중 아자족이있었다. 

아자족을 서양노예상들에게 판 것은 아프리카인들이기도했다.

서아프리카인들은 설탕 호황의 이익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로 갈렸다. 다호메이 왕국과 오요 왕국은 노예를 팔아 부자가 되었다. 

 

노예로 잡혀간 경험이 있는 구성원은 노예 신세를 피했던 집단보다 구성원들의 신뢰 수준이 낮았다.

아시아는 자기 친족 집단 만을 신뢰하는 집단주의적 가치관을 가졌기에 발전에 필요한 상거래 범위가 제약되었다. 

반면 유럽의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동반하는 광범위한신뢰는 광범위한 상거래의 길을 열었다. 

물론 아시아는 친족, 가족 기반의 효과적인 계약 이행과 상거래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노예 무역으로 자기 친족 집단 내부의 신뢰마저 파괴하여 이러한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이러한 존중과 신뢰의 부재는 개인 권리 기반을 약화시키고 개인을 학대하는 무제한적 독재 권력을 키워주게 된다.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중에서 유럽인들이 노예를 많이 잡아간 나라일 수록 노예 무역의 피해를 보지 않은 나라보다 가난하며, 베냉은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다 상관관계지 인과관계는 아니므로 반대 방향의 인과로 해석할수도 있다. 즉 빈곤이 노예 상태를 초래한 거란 것이다. 

그러나 지리적 위치만을 비교한 것에서 노예상태를 경험한 집단인 아자족이 빈곤해지고 저신뢰 사회가 된다는 인과를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억압은 기회가 주어지면 저질러지는 그런 범죄다. 만일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상태고, 저질러도 아무런 뒤탈이 없다면, 그냥 저지르는 것이다. 이는 국가의 위정자들이 테크노크라트들이 권고하는 인자한 행동을 따를 것이라고 가정하는 테크노크라트적 사고방식과는 사뭇 다른 역사적 경험이다.

 

 콜롬비아는 유럽계 엘리트 집단이 다수를 억압함으로써 통치를 확립했다. 

정부가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장악되면 다수의 건강을 향상시킬 압력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소수에 불과한 엘리트가 계속 엘리트로 군림하면 사정은 개선되지 않는다. 콜롬비아는 대통령이 선출직이 아니고 세습직처럼 보일정도로 한 집안이 독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치 엘리트가 통치 집단으로 고착되면 단단히 고착된 경제 엘리트를 우대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왜냐하면 정치 엘리트가 경제 엘리트의 특권을 뒷받침해주고 그들과 경쟁할 신규 진입자의 출현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경제 엘리트는 이러한 우대에 현금 상납으로 보답하여 정치 엘리트의 권력 장악을 돕는다.

결국 콜롬비아의 대중교육 역시도 개선되지 않아서 평균 소득은 인도보다 높지만 아이들의 국제 시험 성적은 인도보다 낮다. 

엘리트 집단의 통치의 장기적 결과로 엘리트 내부자들 이외의 다른 집단을 존중하지 않는 가치관, 다수의 건강과 교육에 대한 과소 투자, 세습적인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가 협력하게된다. 

 

4부 국가인가 개인인가

 

기존에 썼던게 날라간걸 이제야 알았다...추후 2회독을 하게되는경우 채워넣을것이다.

 

 

5부 의도적인 설계인가 자생적인 해법인가

 

여기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기업과 산업이 커가는 내용을 다루며 이때 현대자동차 정주영의일화도 나온다. 

다만 인구증가에 따른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모호함을 나타내지만 지금 지구의 환경적 측면을 고려하면 이는 어디까지나 경제적 측면에서의 부정적 영향의 결과 연구가 모호한거지 환경이나 다양한측면에서의 결과를 보고 낸 결론이 아닌 사견이라고 본다. 

산업의 발전은 발명->모방->의견이 모여 새로운 발명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약간 사람들의 회의나 좌담회같은 모임에서 점차 모호한 의견이 새로운 발명의 기반이 되는 느낌을 준다. 또한 이러한 발명은 각각진행되다가 어느순간 여러발명이 조합되어 발전하기도 한다. 그 예시는 말이끄는 바퀴 수레와 증기기관, 철제 레일의 조합으로 철도 기관차가 발명되는것이다. 과거의 기술과 현재의 기술은 이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흥미로운건 이런 기술의 조합성때문인지 1500년의 기술이 오늘날의 기술(따라서 1인당 소득)을 예측해준다는 문장이다.

물론 현재의 중국을 보면 이러한 것이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이론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게 서구 계몽주의에 따른 개인의 관념의 등장이 현재 서양과 중국의 기술차를 보여주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개인이라는 관념은 두가지 핵심적 매커니즘이 있다. 하나는 권위에대한 도전, 다른 하나는 혁신에 대한 보상이 개인에게 주어진다는 점이다. 

 

세상사람들은 인자한 독재자가 자국민들에게 발전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여전히 중국의 발전에 대하여 관심이 쏠리게된다.

정말로 독재는 발전을 가져다줄까? 

인자한 독재자를 옹호하는 쪽은 두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독재자가 민주주의자보다 발전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약한 변종은 최악의 독재자들이 최악의 민주주의자들에 비해 성장에 해롭다는 점은 인정하나, 최선의 독재자들은 최선의 민주쥐의자들보다 성장에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책에서 이러한 첫번째 주장에 대해 바로 반박한다. 최근에 일어난 성장의 재앙들이 대부분 독재자 집권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ex/ 짐바브웨의 로베르 무가베, 북한의 김일성과 세습후계자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나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첫번째 집권기), 자이레의 조지프 모부투,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잠비아의 케네스 카운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장베델 보카사,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미얀마의 군부정권 등

즉 성공한 독재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게 평균적으로 독재자들이 고도성장을 실현했다는 건 아니다. 평균적으로 성장의 실적은 민주주의가 더 좋다. 

다만 사고방식에서 심리적 편향이 있어서 확률을 혼동해 인과관계를 뒤집어 생각하기 떄문에 

-성장의 기적은 대부분 독재하에서 일어난다는 진술이 

>독재자들은 대부분 성장의 기적을 달성한다는 잘못된 진술이 된다. 

이런 심리적 편향이 대세를 장악하면 오류를 지적하는 증거가 있더라도 전부 쓸모없어진다.

 

또한가지 심리적 편향을 부추기는 이유는 아주 최근 자료만을 사용하여 장기적 역사는 별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빈서판 사고방식의 한 변종떄문이다. 

가령 2008년 금융 위기에서 중국이 미국보다 빠르게 회복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 칼럼에서 독재에도 장점이 있다고 찬사했지만 중국과 미국을 비교하면서 역사적인 기록을 평가 절하하고 최근 30년 성장률이나 고작 최근 4년 성장률만을 비교해서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에 비해 성과가 월등했던 미국의 장기적인 역사는 무시된다. 

 

또한 사람들은 독재자와 전혀 관련없이 독재자의 통치기 일어난 고성장이 독재자의 개인능력이라고 칭송한다.

이러한 예시는 여러 실험에서 드러나는데 무작위로 찬양하는 편지와 반대하는 편지를 쓰도록 결정해준 실험에서 찬양하는 편지를 쓴 사람이 정말로 대상을 좋아한다고 여겼으며, 또한 보상이 무작위로 제공됨을 앎에도 불구하고 높은 보상을 받은 사람이 실력이 좋은거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이 실험에서도 피험자들은 보상이 무작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무시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지도자를 두팀에 각각 한명씩 세워두고 한집단에는 일할 사람을 많이 주고 다른 집단에는 적게 주었다. 여기서 지도자는 할일이 없이 서있을 뿐이었으나 사람들은 사람수가 많은 집단에서 좋은 결과를 낸 것을 지도력의 효과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싱가폴의 리콴유가 대표적으로 칭송받는 독재자이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고려하며 계산해도 그러할까?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결국 개인의 몫이며 독재는 기적을 달성하려고 열을 올리다가 재앙을 초래할 위험이 큰 도박이다. 

 

성장률을 지도자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성장률의 오르내림이 아주 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권기가 그저 커다란 호황기의 한복파네 끼는 운좋은 지도자도 있다. 따라서 그러한 호황 자체가 그들의 지도력이 중요하다는 증거가 되진 못한다. 

결론적으로 좋은 독재자라거나 나쁜 독재자라고 할만한 증거는 별로 없다. 

 

결론에서 저자는 독재자들이 권리 억압을 간과하는 사이, 독재자들은 물리적 결핍을 해결하겠다면서 아주 잘못된 흥정을 내밀었다는 점을 이해하자고 말한다. 

그 중 책에서 내민 역사적 사례 중 하나는 영국 헤일리 경의 이야기다. 

그는 제2차세계대전 동안 대영제국의 인종주의에 대한 거론을 막기 위해 물질적 발전을 강조했다. 그는 제국의 절대권력하에 있는 식민지 국민들의 정치적 권리가 의제에 오르지 못하도록 물질적 발전을 강조했다. 그리고 백인과 비백인의 동등한 권리가 의제에 오르지 못하도록 물질적 발전을 부각시켰다. 우리는 헤일리가 어떻게 미국과 암약을 맺었는지 살펴보았따. 영국이 아프리카인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미국이 문제삼지 않는다면, 헤일리도 미국이 국내 흑인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한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이런식으로 물질적 복지의 향상만을 의제로 삼고 권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그러지 않았나? 가장 기억나는 누군가의 말이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있다'는 여성인권에 대한 빈정거리는 말이었다. 

미국의 전략은 인종 문제를 다루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일환이었다. 흑인들과 남부의 인종분리주의자들 모두의지지가 필요했던 시점에 그는 물리적 발전을 강조하고 권리 문제를 회피했다. 그러한 뉴딜 전략은 몇년도 가지 못하고 시민권 운동으로 와해되었따. 마틴 루서 킹 2세는 미국 흑인들의 빈곤을 가슴깊이 걱정했지만 빈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동등한 권리라는 문제가 희석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앗다. 그는 동등한 권리의 원칙이 수용되지 않는한, 행동을 거론할수도 없고 원칙을 거론할 수도 없음을 알았따. 그는 행동을 이끌어줄 원칙이 없다면 행동도 일어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저자의 추천책

생각에 관한 생각 -대니얼 카너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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